아릿한 포옹황예지(아침달,2023)
처음 여행을 함께 하는 대학 동아리 친구들과 속초를 갔다. 여행이란게 늘 그렇듯 함께한 사람들 간 관계가 흔들리기도 했다. 그렇다고 심각한 건 아니고 당분간 속초의 ‘ㅅ’도 꺼내지 말자는 정도였다. 지금은 웃으며 얘기할 수 있을 만큼 벌써 시간이 지나버렸다.
필수코스처럼 한 서점에 들렀다. 독립서점을 좋아하는 흰쥐도 함께였기 때문일까. 난 서점에 가면 이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을 사는 편인데, 흰쥐는 처음 만난 책도 잘 샀다. 내용도 작가도 잘 모르면서 비용을 지불하고 집에 데려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이번에는 나도 처음 보는 책을 집었다.
『아릿한 포옹』은 사진 에세이다. 사진과 에세이에 흥미가 있다. 카메라로 사진 찍는 걸 좋아하고 글쓰기도 잘하진 못해도 재미있고 좋아하니까 둘을 합친 장르에 절로 관심이 갔다. 좋은 사진과 좋은 글은 뭘까? 표현의 수단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사진과 글을 통해 난 무얼 전하고 싶어할까? 여전히 명확한 답이 없는 질문이지만,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날 긍정해줘” 그런 말을 늘 마음에 달고 사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포옹은 긍정의 끝판왕이다. 포옹은 존재의 인정과 수용이다. 게다가 따뜻한 온기도 느낄 수 있다. 아주 꽉찬 행동이다. 부모님이 어린 나를 학교에 보내기 위해 아침잠을 깨워주며 안아줬던 것도, 친구와 헤어지는 게 아쉬워 역 앞에서 안았던 것도, 앞으로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체 잠시 서로를 끌어안았던 추억도 모두 생생하다.
이 모든 포옹에는 저마다의 아릿함이 있었다. 앞으로 또 어떤 포옹을 하게 될까. 체온이 느껴지는 포옹도 좋고 글과 사진을 통해 꽉 끌어안는 것도 좋겠다 생각한다.
잊지 못해
2024
투 유김빵 김화진 김청귤 구소현 명소정(자이언트북스,2024)
면접이 끝나 배가 고파져 번개로 점심을 먹자고 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미 약속이 있단 말에 아쉬워질 찰나, 만날 친구들이 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여럿이 모여 점심에 이어 저녁까지 종일 함께했다. 유별나게 서점 탐방을 좋아하는 흰쥐도 함께였다. 흰쥐랑 나는 웃음 포인트도, 걷는 속도도 비슷하고 책을 좋아한다는 점도 닮았다. 이 날도 어김없이 책방에 들렀다. 흰쥐는 꼭 서점에 가면 책 한권을 산다. 나는 내 재정상태를 생각하며 서가를 둘러보는데, 책방지기(라는 말도 흰쥐에게 배웠다)가 말을 걸어왔다.
“책을 추천해드릴까요? 찾는 분야가 있나요?”
“소설이요!”
“좋아하시는 작가가 있나요?”
“음, 김화진작가를 좋아합니다.”
나의 독서이력은 대부분 추천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흔쾌히 제안을 받았다. 『나주에 대하여』는 읽었다고 말했지만 『공룡의 이동경로』를 추천하시면 어떡하지? 그건 집에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나에게 놀랍게도 처음 보는 책을 내밀어주셨다. 『투 유』는 김화진 외 다른 작가들도 함께 쓴 단편 소설집이었다. 책방지기는 『나주에 대하여』보다 여기 실린 김화진 소설을 더 감명깊게 읽었다고 하셨다. 저, 이 책 살게요!
독립 서점을 찾는 이유는 뭘까? 서점지기의 취향으로 꾸며졌을 공간의 분위기와 큐레이션이 그 독특한 묘미라고 생각한다. 온라인 서점에서 할인된 가격이 아니라 정가로 책을 사는 까닭은 현장성과 생생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점 로고가 새겨진 도장과 조금씩 껴주시는 책갈피, 종이봉투나 영수증에 그 서점의 독특함이 묻어나오기도 하고 그런 모든 것에 특별한 느낌을 받는다. 무엇보다 사람과 만나 작은 대화를 하고, 책 추천을 받기도 하다니. 이런 매력을 알게 해준 흰쥐에게도, 관심이 없어도 함께 가는 친구들에게도 고마웠다.
그래서 『투 유』를 읽었는가 하면, 아직 읽지 않았다. 언젠가 읽게 된다면 이 페이지에 글도 추가될거라 막연히 생각해본다. 여전히 김화진 작가의 내면묘사에 놀라겠지?
작가 한 명, 단편 하나
2024
퇴근 후 식물김미정(리얼북스,2020)
4년간 묵묵히 자라준 스투키는 내 변한 면모를 어떻게 생각할까? 관심도 없더니 다른 애들 데려와서 예뻐하는 날 보고…
식물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있다. 방을 정리하면서 집이 집답게 편하고 예뻐질 때, 도움을 준 사람들이 많다. 그 중 나에게 큰 영감을 준 덩굴이 어느 날 스킨답서스를 떼어 분양해줬다. 새로운 컵으로 이사한 스킨답서스에게 “괜찮아 엄마 여깄어~” 하고 본 주인과 작별 인사를 시킨 것을 덩굴은 꽤 오래 기억했다.
내 방 자바라 행거에 스킨답서스를 걸었다. 집에 새 친구를 들이고서 물을 주고 관찰하고, 그런 식물 돌보기에 재미가 들 때 늘 그랬듯 관련 도서를 갖고 싶어졌다. 동시에 관심사를 공유한 덩굴에게도 같은 책을 주고 싶었다. 일하다 짬이 날 때 어떤 책이 좋을지 서가를 둘러보았다.선물할거라면서 인터넷에서 재고 확인을 하는 날 보고서, 옆자리 선생님도 그 책 받으면 감동하시겠다고 말해주었다. 책과 함께 평소에 고마웠던 마음을 전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선물을 건네던 카페와 앉았던 자리를 기억한다. 같은 추억을 공유하는 기분을 하나 더 늘렸다.
집에 풀친구들이 아홉이다. 먹으려 사 둔 고구마(준구마)를 물에 담가 무섭게 키우기도 하고, 특별히 봐 둔 식물 없이 멋진 가게를 찾아가 무늬 벤자민 바로크(준시퍼)도 데려왔다. ‘오늘의 가든’ 게임에서 상품으로 몬스테라(준스테라)도 받았다. 새로 난 잎이 가장 키가 클 정도로 쑥쑥 자라는 아이다. 친구들에게 식집사란 것이 알려지며 여태와 현에게 선물 받은 풀들도 있다. 아스파라거스 메이리, 그리고 군자란 비슷한 것… 둘 다 죽지않고 느긋하게 살고 있다. 글을 쓰는 지금 시점에도 아주 잘 자라는 멋쟁이들이다.
식물을 새 집에 두고 싶다고 ㅇㅊ에게서 연락이 왔다. 메세지를 받았을 때 나한테 이런 날도 오는구나, 조금은 감탄했다. 한 번도 식물을 주제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던 친구였기 때문에 더 반가웠다. 그리고 몇 번 분갈이를 위해 들른 식물집 사장님이 나를 기억해주신다. 더 자주 들르고 싶다. 새로운 기분과 추억을 식물을 매개로 쌓아가고 있다. 이 책과 화분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즐거운 기분을 이어가고 싶다. 나랑 같이 무럭무럭 자라줘.
무럭무럭 자라자
2024
새로운 질서민구홍(미디어버스,2019)
준팔 책장에 이 책이 빠지면 안되지. 예진이 초대해준 덕분에 대한을 만나 html을 배우고 『새로운 질서』를 접했다. 화상회의 수업에 청강하는 기분으로 들어갔는데, 나도 본격적으로 배우게 될 줄은 몰랐다. 물론 그러길 바랐지만, 이렇게 흔쾌히 반겨줄 줄은 몰랐는 걸. 예진과 대한에게 정말 감사하다. 밥 한 번 대접한 것 밖에 한 것이 없어 애석하다. 이 글은 둘에게 바치는 감사 인사글일지도 모르겠다.
첫 수업날, 대한은 교재로 『새로운 질서』를 알려줬다. 책 표지를 보자 이 책을 처음 본 것이 아니란 걸 알았다. 옛날, 서촌과 안국 근처 어느 서점에 진열된 책을 구경했던 기억이 났다. 책 크기도 표지도 첫눈에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은 몰라 반가웠다. 빨리 보고 싶어서 그 날 바로 책을 구입했다.
웹의 세계를 알았다. 정해진 형식만 따르던 인터넷 세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을 슬쩍 본 듯 하다. 말그대로 새로운 질서를 배웠다. 웹페이지는 글쓰기와 다름없다고 한다. 그 점에 안심했다는 예진의 말도, html은 언어와 같아서 매일 꾸준히 해야한다는 대한의 말도 전부 새롭고 재미있었다. 내가 모르는 세상에 대한 생각을 듣고 배울 수 있다니 정말 멋지다.
줄도 긋고 싶어서 벼르고 있던 회색 형광펜을 샀다. 웹페이지에 관한 책에 회색펜으로 강조 표시하기, 생각만 해도 너무 멋지다. 언제는 KTX에 앉아 새로운 질서에 밑줄을 그으려다 펜 뚜껑을 떨어뜨린 적이 있다. 엊그제 샀는데 이제 더는 쓸 수 없겠구나 좌절한지 2초 쯤 지났을까 옆자리 아저씨께서 뚜껑을 주워주셨다. 내가 느낀 감사함을 아저씨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왜 기차를 탔는지는 기억 나지 않으면서 형광펜을 주워준 일은 기억할 정도로 고마웠다. 그 아끼는 펜으로 밑줄 친 부분은 아래와 같다.
목록에는 순서, 즉 지배 논리가 있고(13쪽)
디지털 불협화음 시대에 당신을 돌볼 사람은 당신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다.(46쪽)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차이는 원하는 정보와 관련한 검색어를 끌어내는 능력, 즉 추상화 능력에 있다.(61쪽)
웹페이지를 만들면서 대한 교수님께 많은 걸 배웠다. 왜 교수님이라 하냐면, 정말 교수님처럼 잘 지도해줬기 때문이다. 나한테는 그냥 완전한 교수님이었다. 숙제를 내주고 그걸 같이 돌아보고, 조금씩 스스로 배워갈 수 있게 방법을 알려주는 것에도 전부 감탄했다. 어떻게 재능기부임에도 여기까지 정성을 다할 수 있을까? 예진이 없이 나만 배우게 되었을 때도 이제 가르치기를 그만두어도 괜찮았을텐데 끝까지 함께 하다니! 정말 고맙다. 언제 꼭 만나서 같이 놀고 또 대접하고 싶다.
새로운 질서를 배우며 오래도록 기억할 말을 많이 들었다. ‘숙제가 많아 잠을 언제 잘지 모르겠어요~ ‘란 내 말에 ‘잠은.. 죽어서도 많이 잘 수 있으니까요..’라고 덤덤하게 말한 것도 그렇지만, ‘준영은 저의 새로운 질서 제자니까요'라는 말도 잊을 수가 없다. 숙제를 하는 일주일동안 이 말을 계속 생각했다. 제자니까 열심히 공부했다고 대한에게 말까지 했다. 그만큼 ‘제자'란 단어에 의미를 두었고 웹페이지 첫 화면에도 꼭 싣고 싶었다. 난 정말 제자로서 부끄럽지 않길 바랐다. 대한이 열심히 한만큼 제자의 웹페이지를 교수님이 자랑하면 좋겠다.
이 웹페이지, 준팔책장은 나의 추억에 관한 기록이다. 특히 책에 얽힌 이야기다.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재로 왜 책을 골랐을까? 새로운 질서를 배우는 것과 취업준비를 동시에 하면서 깨달은 점이 하나 있다. 난 도서관을 좋아한다는 거다. 이게 이용자로서 좋은건지 일하는 직원으로서 좋아하는 건지 여전히 알 수 없고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게 뭔지 날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좋았다.
글을 쓰는 지금, 내일 마지막 수업을 앞두고 있다. 짧지만 알찼던 기간동안 웹페이지를 배우면서 여러가지 느낀 것이 많다. 하나는 ‘목록'이다.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정리하여 부모와 자식 개념을 만드는 목록 작업이 웹페이지상에서는 안보일지라도 웹페이지의 든든한 받침 역할을 하고 있었다. 공간과 사용목적이 구분되어 있어야 방이 방답고, 집이 집다워 지듯이 웹페이지도 웹페이지답게 되나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인상적이었던 것, 바로 ‘목적의식'이다. 웹페이지를 만들 때 갈피가 잡히지 않거나 힘이 들 때, 그럼에도 계속 만들게 하는 무언가가 바로 목적의식이라고 대한에게 배웠다. 나는 왜 웹페이지를 만들고자 하는지, 이걸 통해 무얼 전하고 싶은건지, 고민하는 지점은 나아가 내가 왜 사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무얼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도 질문하게 한다.
목적의식을 찾으면 길을 잃었을 때 도움이 될 게 분명하다. 웹페이지를 만들 때 뿐만 아니라 삶을 살아갈 때, 목적의식이 있고 없음은 분명 차이가 있을테다. 목적의식 자체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생각없이 사는게 특기인 나에게 좋은 자극이 되었다. 대한교수님, 저 이정도면 괜찮은 제자 맞나요?
제자는 날아다닐 준비중
2024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신형철(한겨레출판사,2018)
책을 잘 읽는 동료가 있었다. 어쩌다 한 번씩 옆 자리에서 근무할 때 추천하는 책을 알려달라고 말을 건 적이 있었다. 당시, 책과 거리가 있는 나에게는 최근에 읽었던 책부터 술술 추천해주시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그 때 적어주신 메모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 꾹꾹 눌러 쓴 추천도서 목록 중 찾아 읽어 본 건 아직 한 권이지만.. 메모를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언젠가 다 읽어보고 이 책을 추천한 이유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그 추천도서 중 한 권이다. 내가 좋아하는 책방에 갔을 때 발견하고는 구입했다. 갑을문고는 지인들을 데리고 갈 정도로 내가 많이 좋아하는 서점이다. 아르바이트생까지도 큐레이션에 진심인데다가 책마다 적은 추천사와 짧은 감상문은 손님이 책과 함께 구입할 수도 있다. 더 놀라운 점은 일을 그만둔 직원의 메모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베껴 써도 무방할텐데 하나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살 수 없다니, 여기에 어떤 존중이 느껴졌다. 이 메모는 온전히 그 분의 것이고, 서점은 이를 지켜야하는구나. 그런 갑을문고의 베스트셀러 코너에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 있던 거다. 바로 구입했다.
책은 〈킬링디어〉라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신기하게도 글을 읽은 후 우연히 그 영화가 대화 주제가 되어 친구 스님과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 그 영화를 아냐? 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었다. 이래서 사람은 책을 읽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읽고 있고 있는 다른 책에 작가 신형철에 대한 얘기가 빈번하게 나왔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다 읽으면, 나중에 작가님을 다시 마주쳤을 때 더 반가워지겠지.
M쌤의 추천도서
2024
나주에 대하여김화진(문학동네,2022)
뭐 부터 얘기해야 할까. 어떤 흐름으로 말을 해야 이 책에 대한 내 마음이 잘 전해질 수 있을까? 그런 생각부터 하게 되는 건 그만큼 소중한 책이라 그럴거다. 나한테는 의미가 있는 책이다.
책을 좋아하지만 읽지는 않았던 사람이 나다. 열다섯 살에 만난 친구N은 서점에 진열된 책을 보면서 이건 어땠고 저건 어땠으며, 어떤 점이 좋았는지 이 작가는 어떤 사람인지.. 등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매대에 있는 책의 절반은 이미 읽어봤다고 말했다. 정말 멋있었다. 그당시 나는 학교 공부만 하는 사람이어서, 같은 학생인데도 N은 나와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걸 알고 신선한 기분이 들었다.
그랬던 내게 책 읽는 재미를, 특히 국내문학의 재미를 알게 해준 책이 바로 나주에 대해서다. 그만큼 재미있는 책이었다. 엉뚱한데 현실감 있고, 살면서 내가 느꼈던 여러가지 마음을 문자로 풀어진 걸 보는데, 그게 참 재미있었다.
어떻게 나주에 대하여를 만났는가하면, 친구 흰쥐가 『공룡의 이동경로』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서모임 '어쩌다 산책' 친구들이 스님의 본가에 모여 논 적이 있는데, 흰쥐가 김화진작가의 책을 들고 왔다. 그 날 김화진 작가가 민음사편집자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제목도 호기심이 드는데, 편집자의 소설가 데뷔라니 너무 궁금해져서 이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었다. 단편 하나가 끝나기도 전에 책을 구입해버렸다. 너무 재밌었으니까 살 수 밖에 없었다.
오 년은 촘촘하게 흘렀다.(90쪽)
내 눈물을 닦아주던 세선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 같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너 울어? 하고 물었을 때 세선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었다. 네가 울지.(49쪽)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경험한 것밖에는 느낄 수가 없고 나는 그런 인간의 얄팍함이 싫으면서도 좋다. 매번 깜짝깜짝 놀랄 수 있으니까.(작가의 말, 309쪽)
온갖 사랑의 형태가 있었다. 웃기고, 충격적이고, 놀랍고, 서글펐다. 내가 모호하게 느꼈던 감정이 활자로 찍혀 있는 재미를 처음 알았다. 이래서 소설이 재미있구나! 책을 읽은 친구와 감상을 나누거나, 작가가 나온 유튜브를 찾아보는 것도, 그리고 무엇보다 문장을 읽으면 그때의 나로 돌아가는 기분이 드는 것, 전부 재밌었다.
재미는 사실 나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재미있으면 더, 그리고 잘 하고 싶어지는게 사람 마음인가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지인들에게 받고서 서랍속에만 두었던 추천 도서 목록을 다시 꺼내어 한 권씩 찾아 읽기 시작했다.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지만 여전히 책을 읽고 있을 N처럼, 내 주변에는 책과 작가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많다. 너무 멋있고 부러워서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당차게 목표를 말했더니, 너도 이미 그런 사람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때 느낀 감정은 신기함과 놀라움, 그리고 재미였다. 이 재미를 잊지 않고 싶다.
좋아하는 작가
2024
지구 끝의 온실김초엽(자이언트북스,2021)
입사 축하 선물로 받았다. 구병모의 『파과』와 함께. 일하느라 정신없이 바쁠텐데 어떻게 친구의 입사 선물을 챙길까? 너무 멋지고 또 고마웠다.
그러면서 올리브영 상품권 어떠냐는 질문에 책 사달라고 조른 나도 웃기다. 사실은 『파과』를 사달라고 꼭 집어 요청했는데, 추천하는 책이라며 『지구 끝의 온실』도 함께 보내주었다. 그러면서 이번엔 빨리 읽어달라는 말도 덧붙이고. 사실 선물을 해준 유르스키는 이전에도 나에게 『아가미』를 선물한 적이 있다. 그걸 내가 받고나서 거의 2~3년 후에 읽었지 아마?
재미있게도 김초엽작가의 소설을 처음 읽은 것도 유르스키의 추천 덕분이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재밌다고 하길래 따라 읽었었다. 정말 재밌더라. 우리 아파트 도서관을 아무도 이용하지 않아 인기도서를 바로 읽을 수 있었던 기억도 난다. 아주 행운이었다. 이번엔 무슨 내용일까,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 음, 올해안에 읽을 수 있겠지?
상품권 말고 책
2024
바깥은 여름김애란(문학동네,2017)
김애란작가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라는 말을 들었다. 우와, 정말 대단하다. 어떤 작가이길래 이런 감상이 나오는걸까. 이 말을 한 덩굴과 함께 중고서점에 가서 추천받은 책을 샀는데, 그 중 한 권이 바깥은 여름이다.
사놓기는 한참 옛날에 사놓고 읽지 않았다. 바깥이 정말 여름이 되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여름에 읽으면 분명 더 재밌을테니까. 그러다가 『습관성 겨울』이라고, 겨울에 읽으려던 시집도 아직 못읽었다. 근데 이런 경우가 나만 있는 건 아니었다. 친구 흰쥐도 그렇게 겨울을 몇 번 보낸 적이 있다고 했다. 반갑고 웃겼다. 이 책만큼은 올해 여름이 지나가기 전에 읽을 거다.
여름을 기다리는 중
2024
러브레플리카윤이형(문학동네,2016)
독서 모임 ‘어쩌다 산책’에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대학 동아리 친구들과의 모임인데, 학교 다닐 때는 친하지 않았던 인연과 만나, 지금은 이 모임을 통해 관계가 깊어졌다.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거 아니지? 여하튼, 2022년 말에 시작한 모임이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는 건 참 대단한 일이다.
2023년 동대문구 동일이네 동네친구에서 활동 지원금을 받아 알차게 활동하고, 연말파티에서는 지정된 짝꿍에게 책을 선물하는 이벤트를 열었다. 윤은 나에게 『러브 레플리카』를 건넸다. 국문학과답게 멋진 글이 적힌 쪽지도 함께였다.
이 책은 윤의 졸업논문 주제 도서였다. 무슨 책이길래 논문 주제로 삼을까? 작가는 또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는데 이렇게 선물받아 뛸 듯이 기뻤다. 실제로 제자리에서 뛰었던 것 같다. 선물을 고르기 전, 이미 가지고 있을까봐 고민하는 윤에게 내 책장 사진을 찍어 보내준 기억이 난다. 섬세한 사람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12월에 선물받았으면서 4월이 다 지나가는 시점에서도 아직 읽지 않았다는 것이다. 혹시 윤이 이 글을 읽는다면, 전화 줄래? 다 읽었을지도 모르니까.
윤에게 준영이가
2024
2020 젊은작가상 수상 작품집강화길 , 최은영 , 김봉곤 , 이현석 , 김초엽 , 장류진 , 장희원(문학동네,2020)
학교 가는 버스 안에서 처음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알았다. 과제가 있었다. 정확히 무슨 과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도서와 관련된 어떤 기획을 조사하고 발표하는 것이었다. 이걸 주제로 삼아야지. 버스 광고를 보며 생각했다. 젊은 작가를 알리자는 취지로 저렴한 가격에 팔리기에 구입에 망설임은 없었다. 읽은 후 단번에 반했고 그렇게 『2017 제8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시작으로 3년간 봄이 되면 찾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멈추었는데, 이 책을 덩굴의 책장에서 발견하곤 너무 반가워 빌렸다. 나중에서야 같은 책이 사놓고 읽지 않은 채 본가에 있다는 걸 알았다.
이 책을 보면 여러 마음이 든다. 대학에 다니는 기분, 과제를 발표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교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던 기억, 문학동네 출판사를 좋아했던 친구도. 그때의 기분이 생생하게 든다. 그리움인지 아쉬움인지 즐거운 추억을 곱씹는 것인지 그 모든 게 섞인 것 같기도 하다. 문학동네가 앞으로도 계속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을 내주어 이런 마음을 잊지 않게 해주었으면 한다.
손쉬운 추억 여행
2024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장강명(문학동네,2015)
중고서점에서 책을 샀는데 묘한 냄새가 났다. 불쾌까지는 아니어도 이질적인 냄새가 나서 읽는 내내 그 냄새를 맡을 수 밖에 없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책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려고 보니 냄새부터 기억 났다. 냄새와 함께 기록을 남겨본다.
장강명이란 사람이 궁금했다. 『산 자들』이란 책을 먼저 샀는데, 왜 이 책을 먼저 읽었을까? 제목에 이끌렸나보다. 나는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고 있나.
읽을 당시 쓰는 일에 빠져있었다. 하루하루 그냥 보내버리면 죄의식이 들어서 그랬을까. 사소한 일이라도 한 일이 있으면 기록을 하고 책을 읽으면 메모도 하고 밑줄도 긋고, 좋아하는 문장은 필사를 하기도 했다. 그 중 몇 가지를 적어보자면 아래와 같다.
그런데 어떤 관계의 의미가 그 끝에 달려 있는 거라면, 안 좋게 끝날 관계는 아예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그 끝에 이르기까지 아무리 과정이 아름답고 행복하다 하더라도?(87쪽)
기분이 이상하다. 갑자기 수십 년이 지나가버리고, 내가 아주 나이를 먹어서 이 자리에 다시 와 있는 것만 같아.(124쪽)
(...)우리는 노선 B를 걷기로 했지. 너는 미래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이기심 때문에.(144쪽)
널 만나서 정말 기뻤어. 너와의 시간은 내 인생 최고의 순간들이었어. 난 그걸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 고마워. 진심으로.(148쪽)
살면서,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 이 모든 걸 다시 겪으라하면 기꺼이 그러겠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면 엄청난 행운이 아닐까 싶다. 나한테도 그런 사람이 있나 생각하게 된다. 뒤집어서,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일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우리는 노선B
2024
만지고 싶은 기분요조(마음산책, 2023)
요조라는 사람을 덩굴을 통해 처음 알았다. 가수면서 글도 잘 쓴다고. 서점에 갈 일이 있을 때 요조의 에세이를 찾은 적이 더러 있었는데 한 권 남았던 걸 누가 사갔거나, 재고가 합작밖에 남지 않았거나 하는 등 이상하게도 인연이 닿지 않았다. 그럼에도 읽고 싶은 마음이 가시지 않았으니까 이북 리더기를 구매하면서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을 가장 먼저 읽었다.
요조는 넘기고 지나칠 수 있는 감정과 생각을 바라보고 글로 쓰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나도 되짚어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어땠는지, 그때의 생각과 감정을 다시금 느끼게 해주었다. 국내문학은 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이 쓴 글이기에 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알고 있는 지역이 나오기라도 하면 왜이렇게 반가운지 모르겠다. 지리에 약하기 때문일까, 나도 알고 있는 지역에 얽힌 요조의 추억을 읽으면 그곳에서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우연히 서울식물원을 지나갔을 때 요조 생각이 났다. 참 재밌고 신기한 경험이다.
퇴사한지 반 년 지난 직장에서 요조를 초청해 북토크를 진행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때다싶어 구매한 책이 바로 『만지고 싶은 기분』이다. 그동안 다녔던 책방에서는 살 수 없어서 인터넷으로 재고 여부를 알아보고 아침부터 대형서점을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책을 구입하고 행사장으로 향하는 기분이 설레고 떨렸다. 요조를 보기 때문이었을까 전직장을 방문하기 때문이었을까? 골고루 섞인 감정이었다. 이어폰에선 요조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북토크가 끝나고 두 가지가 기억에 남았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요조는 몸의 소리를 듣는 것이 중요하다 말했다. 마음가짐에 달렸다며 몸을 혹사시키기 쉬운데, 사람은 마음의 목소리만큼이나 몸이 하는 얘기도 들어줘야한다고. 운동하면서 마음은 앞서있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은 적이 생각나 공감갔다. 다른 하나는 사람과의 접촉이 금지된 코로나19 시기에 사람을 만나지 않으니 글도 쓸 수가 없었다는 요조의 경험담이었다. 그 얘기를 듣고서 사람사이 관계가 없으면 내 직업은 어찌 되는 것인지, 남한테 관심 없으면서도 사람을 좋아하는 나에게 만남이란 무얼 의미하는지 생각해봤다. 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북토크 진행을 맡으신 S선생님은 곧 연남동에 책방을 열 예정이라 하신다. 행사 마무리 후 작가님의 사인 줄을 기다리면서 작은 대화를 나누다 알게 되었다. 나중에 책방에 들르면 날 기억해주실까?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싶다. 그러던 중 어린이 한 명이 요조에게 다가갔다. 정말 책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만큼 만지는 걸 좋아하는 요조는 아이가 내민 팔을 살며시 만졌다. 나긋나긋 대화를 이어가며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에서 어떤 애정을 읽었다.
거의 처음이다시피한 저자강연회, 북토크 참 재밌었다. 전직장분들을 만나뵙고 인사 드리는 소중한 경험도 했다. 사실 떨리기도 했는데 괜찮다고 용기를 준 친구들이 있어 즐겁게 다녀왔다. 참 감사하다. 하고 싶은 일이 하나 더 생겼다. 제주에 있는 요조의 서점, 책방무사에 방문하는 것이다. 언제 갈지는 미정이다. 혼자 갈지 둘이 갈지 여럿이 갈지 정하지 못했으니까 계획도 미뤄뒀다. 『만지고 싶은 기분』은 여러가지로 많은 기억을 되살리는 책이 되었다.
골고루 섞인
2024
구의 증명최진영(은행나무,2015)
오래 전 소설이 신간만큼이나 노출되는 경우가 있나보다. 『구의 증명』도 그런 소설로, 개정판이 나와서 그랬을까. 마침 최진영의 『단 한 사람』도 추천받았겠다, 전작부터 읽고 싶은 마음에 밀리의 서재에 들어갔다.
요즘 이 책이 궁금하다 하니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고 감자가 말해주었다.
“무슨 내용이길래?”
“사람을 먹어”
“헉”
거의 매일 밤 자기 전에 조금씩 읽어나갔다. 소설 속 등장인물 구와 담의 이야기가 생경하면서 또 너무 생생해서 꽤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렇게 서로를 찾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돌고 돌아 서로가 종착점이 되는 삶은 어떤 걸까.
이모는 이렇게 대답했다.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 대답이나 설명보다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고.
생각이 서서히 옅어지고 그 자리에 다른 생각이 들어오자,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구는 엄청나구나.
전부 멍청해. 아주 바보들이야.
살다보면 그보다 좋은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르지만, 더 좋은 것 따위, 되도록 오랫동안 모른 채 살고 싶다.
둘의 인연을 읽으며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 생각나기도 했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 두 책에 대한 내용과 감상이 좀 섞여버릴 것 같기도 하다. 그만큼 두 이야기 모두 절절했기 때문일까.
『구의 증명』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에 대해 SNS에서 작가 인터뷰를 얼핏 보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런 사랑 이야기가 현대에 필요해서 그런 것 같다고 작가가 대답했다. 상대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은 어느 시대건 가치가 있나보다.
엄청나구나
2024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이슬아(헤엄,2019)
2023년 독서모임 ‘어쩌다산책’ 연말모임에서 짝을 정해 상대에게 책을 선물하는 코너를 열었다. 내가 좋아하는 갑을문고에서는 책방 사람들이 적은 글을 책과 함께 살 수 있다. 책 표지에 직원의 추천글이나 소감이 적힌 종이가 붙어있다. 선물할 책은 여기서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친구 스님에게 줄 책을 고르고 서가를 더 둘러보다가, 너무 나에게 하는 말 같은 책을 발견했다.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
그 해 하반기는 내 인생에 있어 다양한 이벤트가 발생한 시기였다. 태어나 처음 겪는 일이 너무나 많았다. 무관심한 성격은 나 자신에게도 해당되었기에, 이렇게 날 들여다보고 상태를 확인하려고 한 적이 없었고 많이 서툴었다. 그래서 울기도 많이 울고 힘들기도 많이 힘들어서 이 시기가 앞으로 나아지기 위한 과정이라 생각하며 지냈는데, 그런 마음 상태에서 『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를 발견한 것이다. 표지에 붙어 있던 직원의 글도 기억한다. 직업상 책을 후루룩 읽어버리는데, 이 책은 그러기엔 아까워 두고두고 천천히 읽고 싶었다고.
그래서, 난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는가? 내가 원하는대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갑을문고 직원의 말을 따르듯 아주 천천히 읽고 있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난 여전히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과정
2024
어린이라는 세계김소영(사계절,2020)
그렇게 몇 년간 어린이들 틈에 있었으면서 아직 다 못읽었다. 그 사실이 묘하게 부끄럽다. 책을 다시 펼친 것도 이슬아 작가의 『부지런한 사랑』을 읽고서 『어린이라는 세계』도 다르게 좋았다는 덩굴의 말을 듣고서였다.
속초에 놀러 갔다가 서점에 들렀다. 알고 있는 책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이 들기에 조금 펼쳐 읽어보았다. 도입부에 실린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는다. 김소영작가가 신발끈을 묶는 것이 서툰 아이에게 나중에는 잘하게 될거라고 말했더니 지금도 잘하는데 오래 걸리는 것 뿐이라는 아이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구나, 오래 걸리는 것 뿐이구나!
일하면서 아이들을 어른과 다름없이 대하려고 신경을 많이 썼다. 부작용으로 어린이에게 극존칭을 써서 거리감이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그냥 도서관을 이용하는 한 사람으로 바라보고 싶었다. 그런 나의 태도때문이었는지, 일한지 한참이 지나서야 얼굴을 알고 인사하는 아이들이 하나 둘씩 생겼다. 내가 조금 더 아이들에게 열려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일하면서 마음이 더 풍부해지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언젠가 함께 일하는 동료가 어린이와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는 광경을 본 적이 있다.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다. 무슨 얘기를 나눌까. 그제서야 나는 남에게도 관심이 없지만 아이들에게도 특별한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퇴사하면서 ‘나 이제 여기 안와’라고 말을 못한 어린이가 한 명 있다. 도서관에 자주 놀러와 말을 걸고, 사서와 노는 걸 좋아하는 신기한 아이였다. 그 아이에게 작별인사를 했는지 묻는 동료의 말에 그 애랑 나는 그래도 되는 관계구나, 그런 용기가 생겼다. 거리감을 핑계로 아이와 나 사이에 긋던 선이 그 물음에 사라진 것 같았다. 너무 뒤늦은 일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잘 지내라는 편지를 써서 전달을 부탁드리고 마지막 퇴근을 했다.
때때로 들려오는 소식을 통해 손편지에 감동을 받은 건 어머님이시고 정작 아이는 별 생각 없어보였다는 얘기를 들었다. 웃겼다! 하지만 그 후에 우연히 앨범 속 내 사진을 발견하고는 ‘보고싶어요!!’라 외쳤다고 하니 마음이 뭐라 표현할 수 없이 따뜻해졌다.
이 글을 쓰다가 내려야할 정거장을 지나쳤다. 그정도로 아이들 생각에 빠진 아침 출근길, 참 소중하다.
나도 보고싶어
2024
침묵의 봄레이첼 카슨(에코리브르,2012)
아래는 독서모임 ‘어쩌다 산책'의 주간인증글을 가져온 것이다.
영광스럽게도 저의 제안도서가 이번 달 주제도서가 되었습니다. 어쩌다 산책 덕분에 미루고 있던 책을 읽을 수 있어요.
침묵의 봄은 고등학교 다닐때 처음 알게된 책입니다. 그 당시 내신에 아무런 반영도 하지 않던 ‘환경’ 과목이 고2때 있었는데요. 담당 선생님도 나이 지긋하신 분이라 그런지 정말 아무도 수업을 듣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화학, 한문 등에 해박한 선생님을 보고 너무나 감동을 받아버리고 말았는데요. 그걸 계기로 1년 후 선생님이 담당하시는 한문동아리에까지 들고 말아요.
대부분 엎드려 자고 있는 환경시간에 저는 수업에 집중하는 몇 안되는 학생 중 하나였고, 선생님께서 추천하셨던 ‘침묵의 봄’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침묵의 봄. 생각 없이 뿌려지는 많은 종류의 살충제가 미래 지구와 인간,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는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책이었습니다.
책이 쓰인 시대 배경과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웠던 당시 저자를 생각해보면 대단한 책입니다.현대에 이르러 2023년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까지, 저자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구나 싶어 씁쓸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여러가지 추억이 얽혀있는 침묵의 봄. 지금은 도서관에서 빌렸지만 좋아하는 서점에서 사서 볼지도 모르겠습니다.(2023)
환경 선생님
2024
잘하고 싶어서홍수민(섬에서 독립출판,2024)
출판기념회 개최 소식을 홍시의 SNS로 알았다. 본인의 출판기념회라는 것도 놀라운데 심지어 제주도에서 열리다니! 정말 멋지고 대단하다.
홍시는 내 친구 스님의 친구다. 즉 친구의 친구로, 처음 만난 건 2023년 연말이었다. 친구의 친구의 친구도 만날 수 있는 멋진 파티를 스님과 그의 친구들이 기획했다고 하여 냉큼 달려갔다. 짧지만 새로운 만남이 있어 즐거웠다. 그 만남 중 하나가 홍시다.
그 후 인연이 닿아 윤과 스님, 홍시와 함께 새해맞이 일출을 보러 갔다. 1월 1일부터 첫차를 탄 것도, 꽁꽁 얼어붙은 인왕산을 오르다 도중에 하산한 것도 모두 재밌는 추억으로 남았다. 또 내가 좋아하는 식당에 같이 가거나, 스님과 홍시의 친구 R도 만나 정동진 영화제를 같이 가자 기약하기도 했다. 나중엔 홍시와 둘이서 놀자는 약속도 했지만 일이 바쁜 관계로 아직 만나지 못했다. 봄이 오면 또 만날 수 있겠지?
취업준비로 마음이 왔다갔다 불안정할 때 홍시가 긴 인생에서 공백기가 몇 개월일 뿐이라는 말을 내게 해주었는데 참 힘이 됐었다. 마음가짐이 멋있고 따뜻한 사람이라 느꼈는데, 이 책에도 그런 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생각을 글에서 그치지 않고 책으로 형태를 갖추는 건 어떤 느낌일까? 이 웹페이지를 만드는 내 기분과 비슷할까? 친구의 책을 읽는 특별함에 4년에 한 번 돌아오는 2월 29일에 완독했다는 특별함이 겹쳐져, 책장에서 이 책의 존재는 단 몇 페이지에 그치지 않는다.
얇지 않음
2024
플레이스서울피터 W. 페레토(프로파간다,2015)
막 사진에 빠졌을 때 만났지만 바로 헤어지고, 잊고 지내다 우연히 다시 만났다. 무슨 사람과의 인연같지만 책에 대한 얘기가 맞다.
직장에서 책장터가 열린 적이 있다. 이용자가 가져오는 개인책을 교환권으로 바꾸고 이를 책장터에서 다른 책으로 교환할 수 있게 하는 행사다. 책장터에 가져갈만한 폐기도서를 정리하다 『플레이스 서울』을 만났다. 외국 건축가가 바라보는 서울의 건물 사진이라니! 재밌어보여서 너무 가지고 싶었다. 그자리에서 내가 챙겨가도 아무도 모르고 또 문제도 되지 않았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후에 구입하려고 찾아 봤을 때 이미 절판된 도서라는 걸 알았다. 세상에! 이걸 알았으면 그때 챙겼을지도 모르겠다. 바로 동네 도서관에 검색해보니 다행히 한 곳에서 소장중이었고 대출하고 빌려보니 생각보다 더 재밌었기 때문에 읽으면서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한 번 봤으니 됐다 생각하고 잊고 살았다가 동네 서점에서 발견하고야 만다. 친구들과 구경 갔다가 우연히 마주쳐서 바로 계산대로 들고 갔다. 다시 만날 줄은 몰랐는데, 조금은 감격스러웠다.
사진으로 보는 서울의 옛 건물들은 보기만 해도 재밌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 S가 집에 놀러왔을 때 나란히 앉아 책을 구경한 적이 있다. 책에 실린 건물을 전부 알지는 못해도 할 얘기는 많았고, 방에 앉아서 하는 서울 구경은 참 재미있었다.
성북천에서 꽃구경을 마치고 『플레이스 서울』에 대해 쓰고 있다. 카메라를 들고 밖에 나간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날 정도로 최근엔 사진찍기에 소홀했다. 취미가 사진이라고 말하기 민망할 지경이었다. 오늘, 오랜만에 찍힌 사진에 만족하는 기분도, 시선을 이끈 풍경에 집중하는 순간도 느꼈다. 또 누군가 좋아하는 게 무엇이냐 물어본다면 사진이라고 답해야겠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사진 찍는 것 참 재밌다!
서울, 만남, 저장
2024
즐거운 남의 집이윤석, 김정민(놀(다산북스),2024)
대학시절, 챌의 추천으로 팟캐스트 ‘영혼의 노숙자'를 처음 들었던 기억이 난다. 기숙사에서 같이 들었을 때 웃긴 방송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는데, 지금도 집안일을 할 때 가끔씩 틀어놓고는 한다. 특히 작가 박상영이 게스트로 나와 오타쿠스러운 이야기나 웃긴 에피소드를 늘어놓는 걸 듣다보면 어이없어서 웃게 된다. 어느 날은 『즐거운 남의 집』의 저자 두 분이 게스트로 나왔는데, 그 방송을 통해 책을 알게 되었다.
내 방은 혁명이 두 번 일어났다. 친구 우시는 본인 스스로 결벽증이라고 할 정도로 방이 정돈되어 있는데, 난 우시의 자취방에 갈 때마다 매번 감탄했었다. 도대체 어디를 더 청소하고 꾸밀 게 있다고 갈 때마다 매번 달라지는 걸까? 조금씩 분위기가 변하는 과정을 보며 감탄하니, 내 방 청소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지옥의 1박이 시작되었는데…
서랍을 다 뒤집어 까고, 20리터 쓰레기 봉투가 몇 개가 나왔는지 모를 정도로 정리하고 또 정리했다. 정말 많이 버렸는데, 뭘 버렸는지도 기억이 안나는 걸 보니 정말 필요 없는 물건이었나보다. 벽에 걸린 냉장고 바지를 스카프로 착각하는 방에서 아주 깔끔한 방으로 탈바꿈했다. 모든 식사와 간식을 대접하며 먼지구덩이 속에서 지쳐 잠들었던 추억도 남았다.
블라인드와 침대 설치를 위해 두 번째 혁명이 일어났다. 직장에서 한 명 두 명 초대하다보니 총 네 분이 함께 해주셨다. 말이 초대지 휴일에 남의 집으로 노동하러 가는 것인데, 심지어 내가 제일 연차가 많았던 걸 생각하면 선생님들이 직장내괴롭힘으로 신고하지 않은 걸 정말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옷장과 침대를 옮기고 커튼박스에 구멍도 뚫고 아주 대공사를 했다. 우왕좌왕 뭘 부탁해야할지 모를 때 알아서 척척 짐을 정리해주시는 선생님들께 너무나 감사했다.
이 모든 정리, 사실 따지고 보면 내 집이 아니라 남의 집에서 한 것이다. 그래서 『즐거운 남의 집』이란 책 제목이 너무 웃기고 내용이 궁금했다. 남의 집이지만 내가 사는 집이니까 정돈할 가치가 있다는 걸 이미 경험했기 때문일까, 바로 동네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하여 지금은 내 책장에 꽂혀있다. 재밌게 읽으려 한다.
사실은 우리집
2024